당통(Danton, 1982) 영화

포스터에서부터 뭔가 섬뜩한 기운이 느껴지는 만만치 않은 영화 <당통(1982)>을 보았다.  피로 물든 손에 쥐어뜯기고 있는 얼굴의 주인은 누구일까?  영화의 주인공인 당통일까?  아니면 그와 대치하는 인물로 그려진 로베스피에르일까?  왠지 내 눈에는 저 손의 주인은
영화 말미에 단두대에서 처형된 당통이고, 얼굴의 주인은 당통 처형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똑같이 단두대에서 목이 날아가는 로베스피에르로 보였다.  물귀신 같은 느낌이랄까...




감독은 안제르 바이다.  폴란드 정치영화 거장이라고 한다.  주연 당통 역에는 제라르 드 빠르디유.  프랑스의 국민배우라고 들었다.  우리로 치면 안성기급이려나??  1982년작이라 이 때는 상당히 젊어 보인다.  연설을 잘 하기로 이름난 당통 역할에 잘 어울렸다.  하지만 어울리기로만 따지면 역시 로베스피에르 역할을 맡은 배우 Wojciech Pszoniak가 최고였다고 생각한다.  온건파 당통 측 인물에는 프랑스 배우가, 강경파 로베스피에르 측에는 폴란드 배우들이 캐스팅되었다고 한다. 



영화배우들과 역사에 남은 실제 인물의 초상화를 비교해 보았다.  그리고 영화를 보다보니 왠지 아주 어린 시절에 본 만화영화 <베르사이유의 장미>가 생각이 나서 덧붙여 보았다.  초상화와 비교해 보니 꽤 싱크로율이 좋다.  어지간히 신경 쓴 티가 난다. 
(생 쥐스트는 딱히 비중이 큰 인물이 아니지만,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도 <당통>에서도 왠지 인상이 강하게 남는 인물이었다.  어릴 때 보던 만화영화에 나온 새파랗게 젊고, 날카로운 인상에, 과격한 데다가 극단적이고, 신경질적인 캐릭터를 영화에서 또 보게 되니 반가웠다.)

당통은 다혈질에 요란하고 시끄러운 인상을 지녔지만, 그는 좀더 인간적이고 혁명 정부의 폭력에 반대하는 온건한 입장이다.  반면 로베스피에르는 얼음처럼 차갑고 냉철한 인상을 지닌 강경파이며 혁명 정부의 수장이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 본인은 사형제도 반대자였다고 알려져 있을 정도로 폭력 자체를 즐기는 인물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어떤 사상을 지녔든지간에 역사적으로 로베스피에르는 공포 정치의 상징으로 남았다. 

영화라기보다는 마치 연극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영화는 이미 프랑스 혁명이 어느 정도 진행된 상황에서 시작한다.  왕정은 무너졌고, 로베스피에르의 혁명 정부는 공포정치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온건파 당통은 강경파 로베스피에르와 대치하며 혁명 정부의 독재를 경계한다.  이들의 대립은 파국으로 치달아, 결국 당통파는 모조리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그리고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의 타락을 예감하며 고뇌에 잠긴다. 

프랑스 혁명사에 대해서 약간의 관심과 초보적인 배경 지식만 있으면 그럭저럭 재미있게 볼 수 있다(물론 아무것도 모르면 정말 재미없을 테지만...;;;).  관련영화를 찾아 봤더니 의외로 프랑스 혁명을 다룬 영화는 별로 없었지만, 무려 360분짜리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1989년작 영화가 있었다^^;;  과연 우리말 자막이 존재하기나 할지 의심스럽다ㅎㅎ;;



영화에 깜짝 등장(???)하는 "혁명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나중에는 열렬한 보나파르트 파가 되긴 했지만-_-;;;).  화면 아래쪽에 혁명가 마라의 죽음을 가장 신성하게 표현한 <마라의 죽음>이 보인다.  나는 과격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혁명 저널리스트 마라의 생애에도 관심이 좀 있어서 눈길이 갔다.   



둘 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작품이다.  왼쪽은 <카미유 데물랭 가족의 초상>, 오른쪽은 <마라의 죽음.>  왼쪽 그림에 등장하는 카미유 데물랭의 아내 루실과 그의 자식은 영화에도 비슷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당통>은 참으로 세세한 고증을 거친 영화인 것 같다.  영화 말미에 하도 고함을 질러대서 목이 완전히 쉬어 버린(이런 꼼꼼한 디테일에 박수를!!) 당통과 그의 동지들은 단두대에 목이 잘 잘리도록(.........) 긴 머리카락과 옷깃을 무참히 잘린 채 처형장으로 향한다.  다비드는 표연히 단두대로 걸어가는 당통의 모습을 스케치한다.   



당통의 재판 과정에서 로베스피에르는 극단적 실정법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 준다.  당통의 재판과 처형은 "법대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다.  분명 혁명 초기 왕족과 귀족의 법에 반대하며 천부 인권 사상과 자연법사상을 무기로 싸웠을 혁명가는 혁명이 궤도에 오른 이후 자신들이 제정한 법을 무기로 삼아 정적을 제거하는 실정법주의자로 탈바꿈했다.  블랙코미디 같은 느낌을 주는 씁쓸한 장면이었다.

이 영화는 나름 프랑스 정부의 후원을 받아 제작한 영화라는데, 정작 영화가 공개되자 프랑스 정치인들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고 한다.  이해가 간다.  프랑스 국민 모두는 자기들의 조상이 일으킨 혁명이 세계사적으로 새 시대를 열었다는 자부심에 가득 차 있을 텐데, 그 혁명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후원까지 해줘 가며 영화를 보니 정작 혁명의 타락과 실패를 다루고 있었으니 말이다.  (솔직히 영화를 제대로 보기나 하고 썼는지 의심스러운 엉터리 기사가 출처라서 믿거나 말거나이긴 한데-_-;;;)프랑스 좌파 지식인들도 꽤나 이 영화에 대해서 "반혁명적"이라며 화를 냈다고 한다. 



이 꼬마는 영화 첫머리에 자기 누나에게 "맞아가면서" 인권 선언을 암기한다.  자유와 평등과 인권을 담은 문언을 맞아가면서 강제적으로 암기하는 것부터 이미 어떤 아이러니를 보여 준다.  그리고 당통이 처형되고 괴로워하는 로베스피에르 옆에서 이 꼬마가 인권 선언을 암기하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혁명(프랑스 혁명이든, 중국 혁명이든, 러시아 혁명이든)에 관한 영상이나 문헌을 볼 때마다 사회 구조를 변혁하기 위해서 치러야 했던 엄청난 '대가'와 '비용', 그리고 그 이후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부작용과 타락을 보고 몸서리를 치고는 했다.  혁명을 가볍게 입에 올리는 자들은 그 무수한 피를 감당할 각오가 있는 걸까.